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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 - 엔도 슈사쿠 | 신, 의미, 무의미

고도고도 2022. 3. 14. 2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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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 - YES24

일본이 자랑하는 현대 소설가 엔도 슈사쿠의 대표 작품. 배경은 17세기 일본의 기독교 박해 시기. 많은 사람들에게 신뢰를 얻고 있던 포르투갈 예수회 소속 신부의 선교와 곧 이은 배교(背敎) 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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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고 연상되는 책은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였다.

제목 '침묵'은 '고도' 그 자체다.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이 '고도'를 기다리듯, 신부와 가치지로는 '침묵'이 깨어지기를 기다린다.

'고도가 오는 것'과 '침묵의 깨어짐'은 '의미'의 도래다. '고도'가 오는 순간 '의미'가 생기고, 침묵이 깨어지는 순간 비로소 '의미' 있었음을 확신할 수 있다. 

더불어 이 책에 의하면 '예수'조차도 '의미'를 기다리고 있었다. 

215/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갑자기 이 소리가 납빛 바다의 기억과 함께 신부의 가슴을 후벼 파기 시작했다. ... 신부는 오랫동안 그분이 기도하는 말이라고만 생각하였을 뿐 결코 하나님의 침묵에 대한 공포에서 나온 말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신부와 가치지로, 그리고 예수까지도 두려워했던 것은 '무의미'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모든 인간이 두려워 하는 것. '의미 없음'.
종교, 사랑, 일, 놀이 등 인간의 모든 행위가 '의미 없음'을 인정하기 거부하는 발버둥이 아닐까.

224/ 이 나라에서 나는 결코 무익한 존재가 아니라네. 이렇게 유용한 존재지. 바로 그거라네. ... 그러나 자신이 아직 유용하다는 것을 몇 번이나 강조하는 그 마음의 초조함은 이해할 수 있을 듯했다.

 

세상은 부조리하다



사르트르는 이 세계가 ‘부조리’하다고 말했다. 원래 세계란 의미를 전혀 찾을 수 없는 곳이라는 것이다. ‘고도’를 기다리고, ‘침묵’이 깨어지기를 바라지만, ‘고도’도 오지 않고 ‘침묵’도 깨어지지 않았다.

사무엘 베케트는 '의미'를 마냥 기다리는 광대를 보여주었고 우리들은 그 광대와 같은 인간의 모습을 측은하게 여길 수 있다. 엔도 슈사쿠는 어떤 대답을 우리에게 주는 걸까. 

294/ 성직자들은 이 모독의 행위를 격렬하게 질책할 테지만, 나는 그들을 배반했을지 모르나 결코 그분을 배반하지는 않았다. 지금까지와는 아주 다른 형태로 그분을 사랑하고 있다. 내가 그 사랑을 알기 위해서 오늘까지의 모든 시련이 필요했던 것이다. 나는 이 나라에서 아직도 최후의 가톨릭 신부이다. 그리고 그분은 결코 침묵하고 있었던 게 아니다. 비록 그분이 침묵하고 있었다 하더라도 나의 오늘까지의 인생은 그분과 함께 있었다. 그분의 말씀을, 그분의 행위를 따르며 배우며 그리고 말하고 있었다. 

위 인용은 소설의 마지막 구절인데 신이 침묵하고 있었는지 아닌지 확실치 않다. 그저 신부 자신의 인생에서 그분과 함께 있었다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고 있다. 그건 '의미'란 신에게 주어지는게 아니라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는지 스스로의 선택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신 앞에 단독자

 


신부의 마지막 선택은 옳은 것일까, 그른 것일까. 

208/ 행위란 오늘까지 교리에서 배웠던 것처럼, 이것이 옳고 이것이 나쁘고 이것이 선하고 이것이 악하다는 식으로 정확히 구별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신부 본인은 이제 행위의 옳고 그름이 정확히 구별되지 않는다는 인식을 하게 된다. 교리 또는 가톨릭의 가르침 같은 외부 판단이 아닌 스스로의 판단으로 선택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가고 있었다.

저자는 실존주의적 삶을 주장하는 듯하다. 신부의 선택은 키에르케고르의 '신 앞의 단독자'를 떠올리게 한다. 형식과 교리에 어긋나더라도 신 앞에 당당할 수 있는 보편타당한 행위를 할 수 있는가. 그렇게 하는 것이 신 앞에 떳떳할 수 있는 진정한 종교인의 자세라고 말하는 것 같다.

 

 

동일한 종교라도 그들이 믿는 신의 모습이 서로 같을까.



우리가 하나의 개념을 얼마나 비슷하게 공유하고 있을까. '신'이라는 막연한 이미지, 개념이 서로간에 얼마나 비슷하고, 얼마나 다를까. 온화한 모습인가 엄한 모습인가, 외국인인가 내국인인가, 아니면 빛과 같은 이미지인가, 뚜렷한 사람의 모습인가. 신은 교리(가르침)의 모습인가. 존재의 모습인가.

아마도 신의 이미지에서 '차이'를 강조하게 되면 모든 종교는 끝도 없이 분열되어서 각 개인의 신이 모두 다를 것이고, '동질성'을 강조하면 모든 신은 하나로 보여 구별할 필요가 없을 지도 모른다.

234/ 저 사람들이 믿음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인간에 대한 얼마나 놀라운 모독일까. 페레이라는 거짓말을 하고 있다. "그들이 믿고 있었던 것은 그리스도교의 하나님이 아니야. 일본인은 지금까지도 하나님의 개념을 갖고 있지 않으며 앞으로도 가질 수 없을 거야

273/ 이제 제 모든 약점을 숨기려고 하지 않겠습니다. 저 기치지로와 제가 어느 정도의 차이가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그보다도 저는 성직자들이 교회에서 가르치고 있는 하나님과 제 주님은 다르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 유혹을 물리친 강한 의지의 힘이 넘쳐흐르는 얼굴도 아니었다. 그의 발 앞에 있는 그분의 얼굴은 여위고 지나치게 지쳐 있었다.

288/ 아닙니다. 내가 싸운 것은 ... 내 마음속에 있는 가톨릭교의 가르침이었습니다.

페레이라 신부는 일본인의 주님과 그리스도교의 주님의 개념이 다르다고  한다. 따라서 다른 이미지의 주님을 믿고 있는 일본에 선교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로드리고 신부는 ‘자신은 배교한 것이 아니고, 가톨릭교의 가르침과 싸운 것’이라고 말한다. '자신의 주님은 가톨릭에서 가르치는 주님과는 다르지만 배교는 아니라고 말한다. 가톨릭의 가르침에 저항한 것일 뿐, 주님은 예전부터 자신 속에 있는 그대로라고.

일본인에게 선교된 가톨릭이 가톨릭일까 아닐까. 서양 사람들의 이미지와 다른 신이면 그것은 다른 신일까. 이미지는 변형된다. 밟히고 찌그러져 예전의 그것과는 모습이 달라진다. 그러나 밟히고 찌그러졌다고 그 ‘신’이 바뀌었다고 말해야 할까.

밟아라. 신은 찌그러지고 변형된다. 그래서 예전의 모습과는 달라졌다. 그것이 ‘신’이다. 우리들 각자의 신의 모습은 찌그러지고 변형된 신이다.

로드리고 신부는 결국 우리 각자가 가지는 신의 모습은 다를 수 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른 것으로 보인다. 신은 그 어떤 ‘이미지’ ‘형식’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로드리고의 신부는 '주님'은 외부에서 만들어준, 가톨릭에서 가르쳐준, '주님'이 아니라, 고뇌와 번민을 통해 자신 안에 있었던 진정한 주님의 모습을 만났다고 말하는 것이 아닐까.

294/ 성직자들은 이 모독의 행위를 격렬하게 질책할 테지만, 나는 그들을 배반했을지 모르나 결코 그분을 배반하지는 않았다. 지금까지와는 아주 다른 형태로 그분을 사랑하고 있다. 내가 그 사랑을 알기 위해서 오늘까지의 모든 시련이 필요했던 것이다. 나는 이 나라에서 아직도 최후의 가톨릭 신부이다. 그리고 그분은 결코 침묵하고 있었던 게 아니다. 비록 그분이 침묵하고 있었다 하더라도 나의 오늘까지의 인생은 그분과 함께 있었다. 그분의 말씀을, 그분의 행위를 따르며 배우며 그리고 말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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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자랑하는 현대 소설가 엔도 슈사쿠의 대표 작품. 배경은 17세기 일본의 기독교 박해 시기. 많은 사람들에게 신뢰를 얻고 있던 포르투갈 예수회 소속 신부의 선교와 곧 이은 배교(背敎) 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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